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데미안
201100549
괴로움을 두려워 하지마라. 나는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. 데미안. 헤르만헤세의 1919년 작품이다. “에밀 싱클레어”라는 소년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. 에밀은 프란츠 크로머를 통해 두 세계 사이의 자신과 마주한다. 전학 온 “데미안”이라는 소년이 프란츠를 쫓아줄 때까지 싱클레어는 식음을 전폐하고 따뜻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한다. 다시 밝은 세계의 구성원이 된 주인공에게 친구가 된 데미안은 에밀이 평생 당연하게 여긴 진리에 다른 면에 대해 토론한다. 카인의 후예가 두려워 후세 사람들이 그들에게 굴레를 씌우고 멀리했다거나 예수 옆에 못 박힌 징징거리는 개종자보단 조우하던 악마를 배신하지 않은 사나이 도둑이 벗 삼기 좋다고 주장하는 친구 덕에 안쓰럽지만 에밀은 다시 고뇌에 빠진 채 데미안과 다른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.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방황하다가 내면에서 갈망하는 여인을 찾게 된다. 하지만 자신의 속에서 솟구치는 무언가는 진정 베아트리체 그녀가 아니었기에 싱클레어는 또 방황한다. 데미안이 전한“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.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한다.” 라는 글귀를 통해 주인공은 스승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긴 토론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하게 되어 결국 길을 떠나고 열망은 싱클레어를 데미안과의 재회로 이끌었다. 평생 찾던 여자와 친구와의 평화로움은 잠시.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통에 자아에 다가선 에밀의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. 어릴 때부터 자신이 서있는 두 세계의 경계에서 힘들어하고 고뇌하는 싱클레어의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은 세상이 찬양하듯 “청춘의 성서”가 아니라 성숙하고 노련한 작가가 선명한 기억에 대해 쓴 글이었다. 그런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면서 스승 피스토리우스와의 에피소드 중에 고백을 한다. “나는 몇 백 개의 일에는 조숙했고, 또 몇 백 개의 다른 일에는 매우 늦되어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. 나는 언제나 나 자신과 남을 비교할 때면 종종 오만과 자만심을 느꼈으나 또한 동시에 우울과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.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천재로 보았고 또 다른 때는 반 미친놈이라고 생각되었다. 나는 내 동년배 청년들의 생활과 기쁨을 같이 나눌 수가 없었다. 나는 종종 내가 절망적으로 그들과 분리되어있으며, 생의 문이 나에게는 닫혀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근심과 자책으로 나 자신을 괴롭혔다.”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공감이 되는 구절이었다. 나도 항상 느끼던 그 어렴풋한 느낌을 글자로 말하니 명확한 느낌이 되었다. 수많은 세대를 거친 청춘들이 “데미안”에 열망하는 이유는 같은 고민을 하고, 고민으로 이끌어주는 그 와의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. 일생 대부분을 “섞인 기름”처럼 산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생각에 전쟁 속 부상 중에 그의 내면을 찾은 것은 의아스럽다. 에밀은 자아를 인지하고부터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을 쫒아가려고 한다. 명확하지 않은 그 길에서 주인공은 괴로워하고 두려움을 갖는다. 이런 자기성찰이 잦을수록 나를 찾는 과정은 멀지않을 것이다. 요즘 청년들의 고민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이다. 아직 자신과의 대면을 하지 못한 청춘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.